KO, JIN HAN 

고진한

붙잡을 수 없는 이미지에 대한 회화적 시선 - 김 정 락 / 미술사학

미술의 발전을 이끌어온 주요한 개념 중 하나는 회화를 인식학(epistemology)의 일종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이다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이라는 지식의 체계를 논한 글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 Las Meninas>를 하나의 범례로 삼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르네상스 이후 회화는 수학이나 문학을 비롯한 ‘고품격의’ 자유학예의 하나로 여겨졌고, 더 나아가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적인 성격의 과학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적 지점에서 미술은 인식학에 대비되는 다른 본질을 가진 것으로 사유되고 있었다. 인식의 창으로서 눈에 대한 과학적인 태도와 더불어 신비주의적 사유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과학주의 소산, 즉 대기원근법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사실상 이와는 정 반대로 신성이나 신비주의적 경향 속에서 미리 등장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대기의 불투명성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은 이 개념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시각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도, 미술이 관여한 이미지 생산의 역사를 조망할 때, 역시 각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원근법이나 광학적 연구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적 실체였다.

현대가 과거의 유산을 부정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의 시 지각에 대한 반성에서부터이다. 예를 들면, 스티븐 컨의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라는 책이 언급하듯이 달라진 공간과 시간인식이 미술의 시 지각을 변화시키는 데에 기여했으며, 그 시기는 산업혁명이 줄기차게 발전한 시기이며, 미술사는 분기점이 되는 매 시기에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 냈다. 인상주의는 급변하는 도회적 생활양식과 이제 짧게 분절된 시간성을 회화의 표현으로 드러냈고, 또한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진 인간의 이동현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한다. 원근에 대한 고정적인 인식체계가 무너지고 나서, 또한 입방체적 세계관이 다시 회의의 대상이 된 것과 같이 근세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고정적 세계관은 꾸준히 해체되어 갔다. 현대미술은 몇몇의 미술이론가들의 교조적인 이론에 의존해서 해석할 일은 아니다. 만약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태도로 시각의 정확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근대성을 이루었다면, 시각적 진실성에 대한 극단적인 믿음은 오늘날 사실주의 미술에서 비판을 받아야 할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작가 고진한에게 있어서도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작가의 작품을 대략 둘러보면,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관심이나 있을까 모호한 의문이 든다. 물론 작가는 반복해서 특정한 사물이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를테면, 사과나 고속도로 혹은 꽃이나 아파트 벽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해석학적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서는 가늠이 안 된다. 이제 모호함은 점차 배가된다. 작가가 행하는 방식은 회화이고 더 나아가 구상적 형태를 지닌다. 여러 측면을 고려해 볼 때, 그의 작풍을 사실주의와 연관해도 그다지 오류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이전의 사실주의나 구상회화가 그 대상에 대한 질문 아니면 그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의 사유에 대한 질문을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이 관계 항에서 고진한의 그리기는 다른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혹은 그가 포커스를 두고 있는 지점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상과 주체 사이의 어디쯤이다.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지만 - 그 확실성에 대한 작가의 궁극적인 회의가 작업의 이슈가 되고 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 대상과 (시각)주체 어디에도 중점을 두지 않는 편이다. 작가는 자신이 그려낸 이미지를 “사이 풍경”이라고 지칭한다.


1. 인식과 감각 사이의 빈 공간을 여행하기 : “사이풍경”

작가는 시각을 우선 감각기관이라는 점을 전제로 작업을 한다. 가치중립적인 그래서 메커니즘으로 정의될 수 있는 인간의 감각수용기관으로서의 눈을 인식을 위한 과정 이전에 내세운다. 그래서 이 시각은 오히려 현상학적 순수성을 지닌다. 광학적이든 신경과학적이든 간에 눈이 수용한 이미지들은 그 존재론적 사실성과는 별도로 시각적 세계를 구성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현대적 시각성에 접근해 갔다. 이 시도는 이전의 다른 작가들 이를테면 게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와 같은 포토-리얼리즘 작가들에게서 먼저 수행되었던 일이다. 하지만 이뿐이랴. 회화에 있어서 시각에 대한 의식의 변화는 이미 인상주의부터 시작하였다. 마네에게서 구체적인 물성으로서의 재현이 해체되었고 다른 한편 세잔에 의해서 세상은 부피로 환원될 형상원리로 수렴되기도 하였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파들은 그것을 다시금 평면 위에 전개하였다. 사실상 현대회화가 평면으로의 이상적인 환원주의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조차 평면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이 여러 층의 레이어로 구성된, 어쩌면 실체라는 것은 레이어 사이에 있을 법한 허구라면 어떤가?

고정된 시각성의 해체는 보는 그리고 그리는 과정에서 현상학적 문제가 된다. 시선은 고진한에게 있어 유랑하는 것이다. 고정된 시선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적인 운동 속에 있으며, 시간과 공간 사이를 비집고 헤엄쳐 다닌다. 즉 그의 시각은 노마디즘의 한 범례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시각을 자유롭게 놓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결과물 중에 하나가 바로 작가의 작품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의 평가로 보았을 때, 그것은 평균 이상의 기대수준을 충족하는 것이었다. “사이 풍경”은 그러므로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눈과 대상의 사이를 떠도는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관념적인 추론이지만 공간에 떠도는 이미지를 파악하려는 의도이며, 그것이 가지는 유동성, 변화가능성 그리고 더 나아가 실체에 대한 시각적 회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이미지는 비구상적이며, 역설적으로 동시에 현상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세잔이 사물의 명료함을 찾아 끊임없는 탐구를 수행했다면, 작가는 오히려 불명료함으로 축적된 이미지의 세계를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식론적 파악에 근거했던 사물과 세계에 대한 태도를 지양하고, ‘환영(simulation)’과 같은 이미지 세계를 재현하려는 의도가 선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진한의 그림에 나타난 형상들은 포커스 아웃되거나, 그 초점이 앞 혹은 뒤에 맺혀 있는 것과 같은 현상 속에 있다. 초점이 빗나간 형상들은 어쩌면 관심이나 인식의 초점이 일치하지 않음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인식론적 시각, 더 자세히는 촉각적으로 대상을 소유하려는 시각은 고진한의 그림에서는 철저히 배제된다. 뿌연 몽환적 이미지가 주요 모티브를 이루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감성과 정서가 먼저 바라본 대상의 모습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현대적 시각이 바라보는 ‘시물라크르’의 세계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2. 형식에 관계된 의혹들 : “느린-그림”, “빠른-그림”

그리 오래지 않지만, 내 눈에 비친 작가의 모습은 약간 낙천적인 세계관을 안고 있었다. 정확히 말해 긍정적이고 천진난만한 사고와 그것에 걸맞은 느린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의 그리기 또한 그렇다. 그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이 낙천적인 작법을 고수해 왔다. 느린 그리기는 단순히 게으름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리기는 계속 층위를 쌓아가는 우공이산의 방식이다. 그리고 언제 그것을 완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의 낙천성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그림을 “빠른-그림” 이라고 소개한다. 이 역설은 그가 붙인 이전의 전시제목에서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림을 닮은 풍경”, “근시안적 풍경”, “깊은-그림”, “흐린-그림” 등등이 그렇다. 그러나 역설적인 어법 속에 그 진위가 숨겨져 있음은 금방 확연해진다.
작가에게 있어 사물과 이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미지가 그것을 생산한 사물에 의존적이며, 지시적인 존재라는 것을 작가는 부인한다. 그의 그림이 말해주듯이 그는 전적으로 이미지에 상관된 현상을 그린다. 그러므로 이미지란 대상과 눈 사이의 매개로 인식되고, 그것이 지닌 불확정성, 불명료성이 오히려 그림의 실질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이런 그의 태도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는 것은 고정된 점과 같다. 그런데 점의 형태가 아니라 선적인 형태로 바라다보면, 점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황(태)에서 바라본 사물에 대한 접근이 된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고정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대한 감각적 소여와 이것을 반영하려는 것이 그의 작업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가 바라본 세계는 안정되고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시시각각 그리고 물리적인 위치에 의해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운동체이다.

다른 문제는 작가가 취한 방식이다. 언급하였듯이 그의 그림은 포커스가 빗나간 혹은 불투명한 막에 쌓여있는 것 같은 혹은 긴 노출에 의해 흔들린 상으로 보인다. 따라서 작품들은 대개 미완성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작가는 완성이라는 개념에 회의적이다. 그리다 만 것 같은 회화적 재현은 그래서 이전 완성이라는 작업개념에 대한 부정으로도 보인다. 작가는 카메라를 이용하여 그런 전초작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것을 회화로 옮기면서 나름의 조작을 감행한다. 작가가 활용하는 기제는 감각이며, 이 감각은 그러나 전적으로 작업수행의 전 과정을 제어한다. 예를 들면 그림과 유사한 포토샵 블루어(blur)효과를 그대로 형상화하는 데에 만족하지 못한다. 너무나 똑같이 적용된 기계적인 결과에 대해서 불만족이 작가의 창작의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감각에 의존한 판단력으로 이것의 완성정도와 대략적인 완성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다.


3. 하이젠베르그(Heisenberg)의 부분과 전체 : “프레임과 의미”

전체는 부분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부분은 전체를 구성하며 동시에 그것을 암시하거나 지시한다. 이 정의는 단지 인문학적 논의의 결과가 아니다. 현대과학의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양자역학의 탄생에서 전체와 부분의 문제에서 발단되었다. 고진한의 그림은 전체를 조망하지는 않는다. 흐린 이미지가 또한 전체적인 윤곽을 상정하지도 않는다. 사실 전체에 대한 인식은 가장 관념적인 차원에 속한다. 우리는 항상 부분을 보여 전체를 추론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작가의 파편화된 세계 혹은 부분 인용의 재현은 타당하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작품의 구도가 보여주는 인용된 세계는 너무나 편린이어서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작가는 전체와 부분을 엮는 어떤 소통적 맥락도 화면에 부기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려진 이미지들은 불안감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프레임에 들어온 부분은 밖의 전체를 제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퍼즐에서 끄집어 나온 편린들은 독자적인 이미지 상을 구성한다. 그렇지만 그 퍼즐은 평면적이지 않다. 오히려 입체적인 세계에서 찾아진 부분이자 고정된 세계는 독립체이다. 작가가 원하는 세계는 그런 입자들이 활동하는 유동적이고 지속적인 부분이다. 독자적인(독립적인) 세계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연속성에서 마치 잘려진 필름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러니까 공간적인 차용이자 시간적인 차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차용된 것의 원본으로 귀속하려는 안정적이고 인식론적인 태도가 아니라 불안정한 인식 불가능한, 귀속하기 어려운 어떤 불안한 지점을 설정하고, 이것으로 하여금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심란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작가는 관객의 입장정리나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그런 이미지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파편화된 이미지, 예컨대 깨진 이미지거나 부분적인 이미지거나 아니면 흐릿해서 명료하지 않은 이미지들은 현기증을 불러일으킬만한 상황을 야기한다. 또한 그림 밖이나 이미지(대상)의 주변이 궁금해지고, 그것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그림일 수도 있다. 거기에 더하여 작가의 의도 한 켠에는 시선의 회피=시각의 비겁한 곁눈질이 발견된다. 피안적 혹은 도피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작가가 직접적인 발언을 삼가고 있다는 느낌도 줄 수 있겠다.


4. 방황하는 이미지

리얼리티는 구상회화가 지닌 목적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구상회화가 사실적이지는 않다. 고진한의 그림이 구상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이론적 관점에서 그것을 사실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든다. 대상을 파악하는 인식론에 의해 판단하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사실성은 바라보는 과정과 그것을 수용하는, 즉 인식 이전의 과정으로서 본다면 그리고 그 시선의 운동성과 시간 그리고 공간적 역학 속에서 살펴본다면 그의 작업은 분명히 사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추상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언급된 추상은 여러 가지 의미로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말한 추상은 해석의 방식으로서 추상을 말하는 것이며, 맹목적인 재현에서 나아가 사물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해 둘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고진한의 그림은 재현보다는 해석하려는 의지가 더 강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즉물적인 모사가 아니라 기억된 잔상들을 소환해 내온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결론을 내리자면, 고진한의 구상성은 대상적 사실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대상을 파악하고 정신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소유하려는 그런 인식론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편안히 혹은 매우 소극적인 자세로 대상을 놓아두고, 자신이 처한 공간, 상황 그리고 관심의 여러 다양한 환경 속에서 읽혀진 혹은 기억된 찰나들을 화면 위에 붙잡아 두려고 한다.

그 인상과 기억의 모호한 윤곽을 재생하는 일. 그것이 회화의 본질이 아닐까? 그린다는 말이 그립다라는 말과 친족을 이루는 것을 보면 우리의 본성 속에는 그런 회화의식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가 자주 그린 고속도로의 풍경은 가장 현대적인 모습으로서의 시각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항상 유동적인 인상과 시선으로 (유목민적)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유랑하는 불안하고 막연한 삶을 투영한다. 무목적적 의식의 감성주의(sentimentalism)가 그림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신경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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